■ 백남준 티브이 웨이브
우리는 공연장이나 경기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텔레비전을 통해 동시에 같은 경관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백남준은 다수가 동일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집합적인 경험, 현장이 아닌 매개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텔레비전 방송이라는 매체의 힘에 주목했다. 그는 삶과 사회에 다양한 물결을 일으키는 TV를 예술의 매체로 활용하고, TV를 매개로 시청자에 의해 작동될 수 있는 예술을 보여줬다.
백남준은 텔레비전과 방송·위성을 통해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춤과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렸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점 대 공간의 소통’이며, “비디오는 공간 대 공간, 영역 대 영역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멀리-보게’ 하는 텔레비전으로 점과 공간을 잇고, 더 나아가 개인들이 자신만의 방송을 제작하고 송출해 크고 작은 TV 스테이션들이 생겨나 독점적인 방송국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미래를 내다봤다.
방송이라는 자극으로 우리가 어떤 피드백을 일으킬 수 있을지, 그래서 우리의 얇은 막, 우리의 알을 깨고 혼돈이나 방해 없이 자유롭게 물결치는 소통의 바다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백남준 티브이 웨이브>는 비디오 아트 텔레커뮤니케이션이 결합된 ‘백남준의 방송’을 키워드로 해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백남준이 선보였던 방송과 위성 작업을 중심으로 그의 텔레비전 탐구와 실험을 조명한다.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백남준은 내부 회로가 각기 다르게 변형된 13대의 실험 텔레비전을 선보였다. 이 전시는 오후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관람이 가능했는데, 이는 당시 서독의 텔레비전이 방송되는 시간대였다. 백남준은 시청자 혹은 관람객이 실험 텔레비전 수상기들을 이용해 방송 프로그램을 다양한 전자기적 신호로 변환할 수 있게 했다.
그가 선보인 13대의 실험 텔레비전 중 하나인 ‘참여 TV’는 연결된 마이크에 관객이 내는 소리에 따라 모니터에서 영상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관객이 내는 다양한 소리는 전자 신호로 변환되고 소리의 높낮이와 크기에 따라 빨강, 초록, 파랑의 삼색 선들이 예측할 수 없고 반복되지도 않는 무작위 한 형태로 화면에 나타난다. 관객들이 마이크에 소리를 내지 않아도 모니터 화면에서 계속 불꽃놀이 같은 이미지가 움직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969년 뉴욕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에서 여린 창조적 매체로서의 TV> 전시 참여 외에도 백남준은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보스턴 WGBH 방송국에서 운영한 예술가 상주 프로그램에서도 활동했다. 방송국의 기기를 이용해 영상과 사운드의 처리와 효과에 대한 여러 실험을 하면서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기술적 토대를 다졌으며, 방송국과의 다양한 협업을 통해 텔레비전에 대한 탐구와 실험을 확장했다.
1969년 3월 23일 WGBH 방송국에서 방영된 ‘매체는 매체다’는 미국 최초의 비디오 아트 방송 프로그램으로 6인의 작가가 참여했다. 프로그램명은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로그램은 알도 탐벨리니의 블랙>, 토마스 태들록의 아키트론>, 앨런 캐프로의 헬로>, 제임스 시라이트의 카프리치오>, 오토 피네의 일렉트로닉 라이트 발레>, 마지막으로 백남준의 전자 오페라 No.1>이 순차적으로 방송됐다.
약 5분 분량의 백남준 작품은 자신의 실험 텔레비전으로부터 직접 녹화한 다양한 댄싱 패턴, 닉슨 대통령과 변호사 존 미첼의 영상 푸티지, 그리고 카메라 세 대로 현장에서 촬영한 3명의 남성 히피와 여성 댄서의 모습을 교차 편집해 우연적으로 생성한 이미지를 송출했다. 이미지들이 중첩돼 환영처럼 보이는 영상 처리 기법과 “이것은 참여 TV입니다” “눈을 감으세요” “2/3만 눈을 뜨세요” 등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는 내레이션을 특징으로 한다.
백남준은 방송국에서의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얻은 기술적 지식을 바탕으로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만들었다. 방송국의 ‘거대한 기계’가 자신의 ‘반기계적 기계’가 태어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 바 있는 그는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영상을 ‘연주’할 수 있는 이 기계를 통해 일방향의 방송 시스템 안에서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닫혀 있지 않은 환경, ‘열린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백남준은 일본의 공학자 아베 슈야와 함께 연구를 거듭한 끝에 영상을 편집하고 합성할 수 있는 기계인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1969년부터 1970년에 걸쳐 처음 만들게 된다. 이 기계는 멀티 인풋과 멀티 아웃풋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카메라 등 여러 외부 영상 소스를 받아 실시간으로 형태와 색채의 분리, 결합과 반복, 해상도 조정, 분할과 확대, 차단과 감광, 압축과 피드백, 주사방식과 구도의 설정 등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를 생성해 송출할 수 있다.
1970년 8월 1일 오후 9시부터 4시간 동안 WGBH 방송국에서 생방송된 ‘비디오 코뮨’이 바로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사용해 실시간으로 제작된 첫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틀즈’라는 부제답게 방송 내내 비틀즈의 음악이 계속 흘러나온다. 동시에 비틀즈의 뮤지컬 영화, 샬럿 무어먼과 백남준의 퍼포먼스 기록 등 녹화 영상들과 함께 현장에서 즉석으로 촬영한 이미지가 신디사이저에 의해 자유로운 형태로 왜곡, 변형, 합성되어 화면을 채워 나갔다.
“전자 벽지나 라이트 쇼로 여기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거나 화면의 색상, 밝기 등을 조절하라는 식의 내레이션도 추가함으로써 시청자들까지 영상 이미지의 창작에 끌어들였다. 방송 도중 신디사이저 기계를 조정할 경우, 당시 미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오사카 마이니치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과 광고들을 편집하지 않은 채 자막 없이 삽입했다. 미국-일본 방송국 간 일종의 협업이면서, 국경을 넘는 ‘글로벌’ 방송에 대한 백남준의 의도가 표명된 첫 작품이다.
한편, 백남준은 폐쇄 회로 카메라를 이용해 이미지와 실재의 순환 관계를 보여주고 여기에 관람객의 참여까지 이끌어 낸다. 폐쇄 회로 카메라의 재귀적인 구조는 TV 방송, 시청자, 그리고 사회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환구조와도 닮았다. 지금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나의 삶은 TV 방송이 포착한 사회의 삶과 얼마나 가깝고 또 얼마나 멀까. 백남준은 폐쇄 회로를 이용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방송이 매개하는 현실과 그 경험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부처가 TV 모니터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TV 부처’는 모니터 뒤편에 설치된 폐쇄 회로 카메라가 불상을 실시간으로 찍은 모습이 화면으로 나타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종교적 구도자이며 동양적 지혜의 상징인 부처와 현대 문명의 상징이자 대중매체인 텔레비전의 대비,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시즘과 선불교의 명상을 전자적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 백남준은 무엇보다 실재하는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실시간 영상 이미지가 계속 순환하는 구조에서 현실과 재현의 관계, 동시적으로 보이는 둘 사이에 발생하는 미세한 입출력 시간에 주목했다.
다른 작품 ‘실제 물고기 / 생방송 물고기’도 그 맥락을 이어간다. 나란히 놓인 두 대의 텔레비전 중 왼쪽의 TV 케이스 안에는 어항이 들어가 있고 그 속의 물고기를 폐쇄 회로 카메라로 촬영해 오른쪽 모니터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어항을 닮은 수상기의 형태는 작품의 구도를 흥미롭게 연출한다. ‘real’과 ‘live’라는 대구로 구성된 제목은 ‘실제 물고기 / 살아 있는 물고기’라는 동어반복이 되어, 생방송으로 보는 이미지가 과연 ‘살아 있는’ 것인지 되묻는 구조가 된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점과 공간을 잇는 소통이며, 나아가 점이 아닌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소통하게 하는 것이 비디오의 최종 목표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백남준은 당시 미국의 TV 방송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다른 문화, 다른 시각의 역사 등을 다룬 비디오를 제작해 방송하고 서로 다른 문화권의 지역들을 위성으로 연결하는 전 지구적 방송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과달카날 레퀴엠’은 제2차 세계대전의 TV 아카이브 기록 영상과 전쟁의 흔적이 남은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영상을 병치, 교차하며 보여준다. 내레이터이자 인터뷰어인 샬럿 무어먼은 미국과 일본의 참전 용사, 섬주민들과 인터뷰를 하고, 섬의 곳곳에서 백남준과 함께 군복을 입고 첼로를 등에 맨 채 포복하거나 반으로 쪼개진 바이올린을 끄는 등 여러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벌였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2년간 작업한 이 작품에서는 백남준의 실험적인 합성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백남준은 예술가들이 베트남, 중국, 뉴욕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를 비디오로 탐사해 방송하는 ‘비자(평화 통신원)’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중 ‘중국에서는 우표에 침을 바르지 않는다’는 ‘미디어 셔틀: 모스크바/뉴욕’과 함께 백남준이 직접, 합성해 제작한 작품이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미술비평가 그레고리 배트콕과 3명의 동료 여행객이 2개월 동안 현지에서 촬영한 비디오를 여행에서 돌아온 1년 후에 함께 보며 나눈 대화를 담았다.
‘비자(평화 통신원)’ 시리즈는 관광객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국적인 풍경, 다른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낯선 경험 등 여행지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들 속에서 타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실질적인 문화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백남준은 각 나라의 문화 자체를 탐구하기보다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문화적 충돌의 지점을 끄집어내고자 했다”고 언급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일주일 전인 1988년 9월 11일 백남준의 기획으로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대규모 위성 프로젝트 ‘세계와 손잡고’가 0시 30분부터 2시까지 생방송됐다. 냉전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는 시대를 상징하듯이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해 11개국 방송사가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백남준의 ‘위성 오페라 3부작’을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 바이 키플링’과 마찬가지로 팝 가수들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뒤섞이는 쇼였다. 앞선 두 프로젝트와 차이점 있다면, 서로 다른 지역을 생방송으로 오가는 콘텐츠의 비중은 줄고 각 방송사가 제작한 프로그램의 송출 위주로 꾸며졌다는 것이다. 중국은 쿵후와 곡예, 브라질은 살사 카니발, 아일랜드는 자동차 경주, 독일은 브람스 생가 콘서트 등 각국의 대표적인 문화 소재가 다뤄졌다.
주요 작품 20여 점을 지나, 전시장의 끝으로 향하면 백남준 연보와 방송 기술사를 동시에 접하게 된다. 음악, 코뮌, 위성, 인터넷 TV로 한발씩 나아간 그의 행보는 미디어 아트의 개척자로서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실험적이고 창의적으로 작업한 역사를 증명한다. 더불어 그가 텔레비전 방송에 끼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들을 실제 텔레비전을 통해 시청하는 것도 가능하다. 백’s 비디오 박스는 관람객 참여 공간으로, 1960~80년대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세 개의 방에 들어가 비치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마음에 드는 백남준의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시청한 작품, 즉 시청률이 가장 높은 방송이 주간, 월간으로 집계되어 근처 대형 스크린과 전시실 출구 빌보드에 올라간다.
더불어 비디오 신디사이저로 창작자, 관람객, 비평가의 경험을 융합해 예술적 경험을 극대화하는 참여형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크래커(김화슬, 김정훈)가 제작한 ‘씬디사이저’는 ‘SEE’와 ‘synthesizer’의 합성어로 백남준의 작품들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시 보고,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상호작용 방식과 매체로 확장하고 재해석한다. 관람객은 비디오 신디사이저 역할을 하는 컨트롤러를 사용해 적극적인 발신자와 창작자로서 이미지를 선택하고 조작해 새로운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전화는 점 대 점의 통신 시스템입니다.
라디오, TV는 물고기 알처럼…
점 대 공간의 통신 시스템입니다.
비디오 혁명의 최종 목표는 혼돈이나 방해 없는
공간 대 공간, 또는 영역 대 영역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 백남준, 「빙엄턴의 편지」, 1972년 1월 8일”
점 대 공간 소통의 상징으로 백남준이 비유한 물고기 알은 TV 방송 시스템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시청의 모습에도 비춰볼 수 있다. 물고기 알은 타인, 다른 사회, 다른 문화권과 ‘나’를 분리시키는, 시청자인 개인을 둘러싼 얇은 막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문화권의 벽을 허물고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전 지구적 쌍방향 소통과 화합을 꿈꿨던 백남준의 비전은 1인 크리에이터 및 유튜브 시대에서도 유효하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백남준의 은하계 속에 살고 있다.
■ 백남준 티브이 웨이브
2020.05.12. - 2021.03.07.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제1전시실
10:00 ~ 18:00 (7-8월은 19:00까지)
(매주 월요일, 매년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휴관)
무료(사전예약 신청 후 관람)
사진 및 자료 | 백남준아트센터
June 11, 2020 at 06:2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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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어항, '진짜' 살아있는 물고기는?…백남준이 시대를 앞선 예술가인 이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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