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대학병원들에는 흔히 '명의'로 불리는 의사들이 있다. 환자들이 쉽게 신뢰하게 되는 스타 의사이자, 학계를 선도하는 ‘키 오피니언 리더’(Key Opinion Leader, KOL)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의약품, 치료재료 선택에 영향력이 큰 만큼 제약·의료기기업계는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영업 경쟁을 벌인다. 때로는 약품과 의료기기 채택, 사용량 증대 대가로 불법 리베이트를 주고 받다 적발되는 사건이 뉴스를 탄다.
중간유통업자 ‘대리점’이 로비 창구 역할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리점이 이른바 ‘백마진’(Back-margin) 형태로 의사에게 매출의 일정 비율로 뒷돈을 건네는 리베이트 수법은 잘 알려져 있다. 가까운 관계를 맺어온 의료인이 특정 의료기기를 많이 사용해주는 대가를 주는 것이다. 또 의료인이 친인척, 지인 등 대외적으로 본인과 관계 없어 보이는 인물을 대리점에 앉히고, 특정 업체 의료기기를 유통하면서 직접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뉴스타파는 심장혈관 치료 분야의 스타 의사와 의료기기업체, 대리점의 수상한 관계를 들여다 봤다.
아주대병원 전 병원장, 의료기기업체와 한몸이 되다
우리 몸의 심장 근육은 세 가닥으로 이뤄진 관상동맥을 통해 혈액을 공급받는다. 이 혈관이 좁아지면 산소와 영양을 실은 혈액이 심장 근육으로 제대로 흐르지 못한다. 그 결과,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을 불러오는데 이럴 경우 좁아진 관상동맥을 다시 넓혀주는 ‘중재시술’이 필요해진다. 좁아진 혈관에 풍선이 달린 카테터를 삽입한 뒤 풍선을 부풀려 확장하거나, 금속망 형태의 ‘스텐트’를 혈관에 삽입하기도 한다. 스텐트는 확장한 혈관이 다시 좁아지지 않게 지탱해준다. 이 분야의 스타 의사를 경기권역 최대 의료기관, 아주대학교병원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아주대병원 순환기내과 탁승제 교수. 병원은 탁 교수를 ‘심장혈관 중재시술의 마이더스 손’이라 부른다. 병원 내 입지도 탄탄하다. 그는 병원 심혈관센터장을 맡았고, 행정 요직인 아주대의료원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2014~2018년 4년간 병원장을 지냈다. 탁 교수와 아주대병원은 ‘제노스’(Genoss)라는 국내 의료기기 업체가 만드는 풍선 카테터, 약물방출형 스텐트 등 의료기기를 심혈관 치료에 쓰고 있다.
제노스는 첨단 의료기기 국산화 흐름의 대표주자다. 관상동맥 등 심혈관 스텐트 분야는 글로벌 의료기기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다. 국내 스텐트 시술 열에 아홉은 메드트로닉, 애보트, 보스톤사이언티픽 등 수입 제품을 쓴다. 국산 후발주자인 제노스는 시장 점유가 쉽지 않은 처지다. 그래서 2018년 보건복지부는 제노스를 ‘국산 유망 의료기기 성능 개선 지원 대상’에 선정해 밀어줬다.
그런 제노스와 탁승제 교수의 관계는 각별하다. 제노스가 설립된 직후인 2005년부터 탁 교수는 제노스 제품 개발과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임상시험에 참여해왔다. 제노스가 개발한 약물방출형 스텐트(Drug-eluting stent, DES)를 다루는 다기관 임상시험 때는 책임연구자로 활동했다. 아주대병원에 따르면 탁 교수는 아주대학교 산학협력단을 통해 제노스와 매년 자문계약을 체결했다.
제노스를 학계에 알리는 현장에서도 탁 교수가 포착된다. 의료계 주요 학회가 개최하는 대형 학술대회에 가보면 제약사, 의료기기업체들이 회사 이름을 내걸고 비용을 후원하는 ‘오찬 심포지엄’(Luncheon symposium)이 여럿 열린다. 탁 교수는 2017~2018년 대한심혈관중재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제노스의 오찬 심포지엄을 이끄는 좌장을 맡았다.
이들은 왜 함께 아주대병원 대리점을 차렸나
이렇듯 탁 교수와 제노스는 십수년간 끈끈한 비즈니스 관계를 쌓아왔다. 그런 회사의 심혈관 의료기기가 아주대병원에 공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문은 시작된다. 뉴스타파는 제노스와 아주대병원을 연결하는 대리점의 존재를 알게 됐다.
제노스는 아주대병원에 관상동맥 스텐트, 풍선 카테터 등을 직접 납품하지 않는다. 제노스 대신 경기 성남에 있는 M 대리점이 아주대병원과 계약 관계를 맺고 있다. 2009년 설립한 이 대리점의 법인 등기를 열람해보면, 함께 임원을 맡은 배경이 궁금해지는 인물들이 확인된다.
먼저, 제노스의 정 모 대표이사, 정 모 영업총괄이사가 대리점의 사외이사와 감사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의료기기 제조사 임원들이 회사 대신 영업하고 수수료 수익을 거두는 대리점 경영에 관계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들과 같은 시기, 이 대리점 사외이사로 이름 올린 2명은 제노스의 제품이 공급되는 아주대병원 순환기내과의 교수들이다. 그 중 한 사람이 탁승제 교수다.
즉, 아주대병원에 제노스 제품을 납품하는 M 대리점은 제노스 핵심경영진, 그리고 그들의 영업상대인 아주대병원 의료진이 같이 차린 회사인 셈이다. 다만 이들은 2011~2013년 차례로 임원에서 사임했다. 그렇다면 이 대리점이 아주대병원과 거래하고 거두는 수수료 수익은 누가 가져가는 걸까.
대리점 등기를 보면 현재도 사내이사로 대리점 대표를 맡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문 모 씨다. 문 씨는 탁승제 교수의 배우자로 확인된다. 법인 및 부동산 등기상 문 씨의 주소지로 확인되는 아파트도 탁 교수가 소유했던 곳이다. 결국 탁 교수 부부가 대리점이 벌어들인 수수료를 가져가는 구조를 갖춘 것이다. 이 대리점은 제노스를 대신해 서울·수도권 병원 5곳 가량에 영업하고 있는데, 아주대병원이 주요 거래처다.
아주대병원 스텐트 대리점, 수익은 어디로 가나
제노스의 매출 자료와 관계자 증언에 따르면 M 대리점은 탁 교수가 아주대병원장이던 2018년에만 3억30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제노스의 전국 대리점 십여곳 가운데 매출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핵심적인 대리점이다. 제노스 전직 직원 등의 설명에 따르면 M 대리점이 제노스의 약물방출형 관상동맥 스텐트를 아주대병원에 납품할 경우, 건당 30만~45만 원의 수익을 거둔다. 해당 스텐트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제품으로 보험급여상한가가 약 200만 원이다. 대리점은 보험급여의 일부를 수익으로 챙기는 것이다. 통상 의료기기 대리점의 수수료 비율이 20% 안팎이라고 보면, 탁 교수 측은 대리점을 통해 연간 수천만 원을 챙길 수 있다.
제노스 측은 정확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제노스 대표이사 정 모 씨는 기자와 통화하며 거듭 “잘 모르겠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의 대리점 사외이사로 수년간 이름 올렸지만 대리점 설립 배경과 탁 교수 측과의 관계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제노스 측이 탁 교수 배우자가 운영하는 M 대리점을 특별하게 지원한 정황은 뚜렷하다. 병원 납품, 결산 등 대리점의 실무도 대리점 직원이 아닌 제노스의 영업사원들이 도맡았다는 것이다. 뉴스타파 취재진과 접촉한 복수의 제노스 전직 관계자들이 이런 특혜를 알고 있었다. 공정거래법은 이처럼 ‘부당하게 다른 회사에 인력, 용역 등을 제공하거나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는 영업 방식을 불공정거래행위로 금지한다. 또 ‘거래상 실질적인 역할이 없는 다른 회사를 매개로 거래하는 행위’ 역시 규제한다. 이를 어기면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아주대병원 “이해충돌 없지만 겸직 제한 위반…추가 조사”
뉴스타파는 아주대병원 측에 취재 내용을 알리고 해명을 요청했다. 아주대병원은 대면 인터뷰는 거절했지만 서면 답변서를 보내왔다. 병원 측은 취재진의 해명 요청을 받은 뒤에야 해당 내용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탁승제 교수와 대리점, 제노스의 관계에 대해 “환자의 선택권과 이해충돌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적절한 스텐트를 선택”하며, 제노스의 스텐트는 “타사 스텐트에 비해 재질과 기능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병원은 탁 교수가 교육공무원법 및 아주대 교원인사규정상 겸직제한, 영리업무 금지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병원 측은 탁 교수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기관의 승인 없이 겸직제한을 위반해 영리법인(대리점) 사외이사로 등기한 점 외에는 특별한 위법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병원은 감사팀의 ‘추가 조사 후 그 결과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아주대병원 측의 조사 의지는 뚜렷하지 않다.
“대리점 가족 관계에 대한 건 법적인 하자는 없는데, 도의적으로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저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아주대병원 대외홍보팀 관계자
뉴스타파는 탁승제 교수 본인에게도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연락했지만, 그는 “더 드릴 말씀이 없다”며 추가 해명은 거절했다.
의사-업체의 대리점 운영 작전, 업계도 혀를 내두르다
뉴스타파는 탁승제 교수와 제노스의 관계에서 드러난 대리점 특혜와 관련해 의료계, 의료기기업계 내부 인사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복수의 의료기기산업협회 관계자들은 ‘대학병원 유명 의사와 가족, 제조업체 경영진 3자가 동시에 대리점 임원을 맡은 사례가 있다’는 기자의 설명을 듣고, 대리점의 법인 등기를 본 뒤 “윤리적으로 크게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심혈관 분야를 잘 아는 한 대리점 사장은 기자와 만나 “정말 단단히 바보같은 일을 벌인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이같은 리베이트성 거래 구조에 대해 “단순히 ‘뒷돈’이 아니라 건강보험재정을 갉아먹는 범죄라고 지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혈관 치료 전문인 한 심장내과 교수는 이번 사안에 대해 “그런 교수가 있다면 자신의 권력에 너무 둔감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June 17, 2020 at 03:39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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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공생법 Ⅱ] ②아주대병원 '스텐트 대리점'의 진짜 주인 -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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